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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언론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범국민적 모금에 의한 새 신문의 창간을 내외로 선언합니다. 우리는 지금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새로이 열어야 할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기본권을 유린해 온 오랜 독재체제를 청산하고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되어 있는 비민주적인 요소들을 제거하여 국민이 주인되는 진정한 민주화를 실현시키고, 분단을 극복하여 민족의 생존권을 확보하여 생활의 향상을 이룩하는 한편,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아 이 병든 사회를 건강한 사회로 바꾸어 놓아야 할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 속에서 참다운 민족문화를 꽃피게 하는 한편 비뚤어진 교육을 바로잡아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발휘케할 수 있는 교육을 실현시키는 것 역시 우리가 성취해야 할 주요과제입니다.
이러한 우리사회와 민족의 광범위한 과제는 국민 모두의 힘과 뜻과 지혜를 남김없이 발휘케하고 동원해 냄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을것이며 그것의 가장 강력한 수단의 하나가 누구나 자기의 현실과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민족적 언론임을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일입니다.
우리가 한세기에 가까운 언론의 역사를 두고서도 이제 새 신문을 창간하고자 하는 것은 이같은 민족적 역사적 과제가 참된 새로운 언론을 어느 때보다도 시급히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1896년 이 땅에 '독립신문'이 창간된 지 근 백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그 동안 우리의 언론은 외세 아니면 독재권력의 억압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왔고, 진정 민족을 위한 자주적 언론을 갖지 못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주 민족언론의 숙원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새 신문의 창간을 결심하게 된 것은 이 땅에 언론매체가 부족한 때문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 사회는 백만의 부수를 주장하는 여러 신문, 97%의 보급률을 자랑하는 텔레비전을 포함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방송망과 수십만 부를 넘는다는 월간지와 주간지 등 수많은 언론매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굳이 새 신문을 창간하고자 하는 것은 국민의 목소리와 민족의 양심을 대변하는 바르고 용기있는 언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제 통치 밑에서 이땅의 언론은 외세의 억압으로 민족언론으로서의 구실을 못하다가 8.15해방을 맞았으나, 민족의 분단상황 속에서온갖 탄압과 간섭 때문에 제 구실을 못해왔습니다. 특히, 5.16 군사쿠테타 이후 20여년 동안 이 땅의 언론은 이른바 근대화 바람 속에서 사실과 진실을 은폐, 왜곡하고 상업주의적인 보도에 급급함으로써 독재권력의 지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언론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독재에 항거한 양심적인 언론인들이 1975년과 1980년 언론현장에서 무더기로 추방당하고 투옥되는 시련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 땅의 언론은 국민으로부터 '제도언론'이라는 불신을 받고 있습니다. 80년대 언론은 언론기본법이라는 법적 구제도 부족해, '보도지침'을 통한 권력의 일상적인 제작 지시로 거의 제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개탄할 일은 오늘의 언론은 이러한 통제 속에서도 이미 지난 날 보여준 바와 같이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용기있는 저항정신을 보여주질 못하고 오히려 유유낙낙 권력측의 부단한 간섭과 규제에 순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언론현실은 탄압의 결과라기 보다는 많은 경우 자진 협조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언론다운 언론의 부재는 오늘의 언론인들의 도덕적 차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권력의 정책적 의도하에 언론기업이 구조적으로 예속당해 이미 자주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한 둘 양심있는 언론인이 남아있다 해서 언론이 제 기능을 되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과 같은 통제와 억압의 틀 속에서 언론이 저항다운 저항을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제도언론은 그 기업구조로 보아 비록 이 땅에 민주화의 꽃이 핀다해도 정치적 경제적 자주성을 견지하지 못한 채 필경은 권력의 입장에서 국민에게 진실을 전달하지 못하고 그들을 오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 언론의 창간을 통해 지금의 제도언론이 갖는 이 같은 구조적 결함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이것을 위한 첫째 요건은 기존의 언론처럼 몇 사람의 사유물이 되거나 권력에 예속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책정한 창간기금 50억원을 나라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모든 사람의 참여로써 이룩하여 문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되는 신문을 만들고자 합니다.
새 신문은 나라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민족적 고통에 동참하는 가운데 책임있는 편집을 다 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이런 근거로 해서 새 신문은 국민에 바탕을 둔 언론으로 성장할 것이며 따라서 민주적 가치와 사회정의를 지향하면서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친 온갖 사실들을 언제나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숨김없이 공정하게 보도할 것입니다.
오늘의 제도언론이 보여주듯이 사소한 일은 크게 선정적으로 보도하고 정작 크고 중요한 정치, 경제, 사회의 문제들은 은폐하거나 왜곡 보도하여 국민들을 오도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노동자, 농민, 여성 등 기존언론이 소홀히 다루는 부분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보도할 것입니다. 신문이 걸어야할 정도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권력이 요구해 올지도 모를 부당한 간섭을 거부하고 '국민의 신문이며 신문인의 신문'이라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공정하고 신중하고 그러나 용기있게 진실을 보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한겨레신문이야말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정도를 걷는 참된 신문임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어떠한 장애도 극복하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신문을 키워갈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굳은결의는 국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로써만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며 오늘의 이 발기 선언대회가 역사적으로 길이 남게 될 것을 믿어 심치 않습니다.
1987년 10월 30일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